기생충을 보고, 관계의 측면에서…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야 기생충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한국사회의 모습들이 여러가지 메타포와 구조로 표현되어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기생충을 해석했다. 평론가들은 주로 ‘선’과 ‘냄새’같은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를 구분하는 메타포에 관심을 가지는 듯 하다.

영화는 가진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냄새는 인내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과 자신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침범당하는 것에는 인내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워낙 많은 평론가들의 각자 생각들을 쏟아 내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목하지 않은 부분들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존재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진자들은 가지지 않은 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가진 자들은 ‘선’을 그려 놓고 가지지 않은자들이 그 ‘선’을 넘지 않으면 용납한다. 비록 냄새가 나더라도 그 정도는 용납한다.

기생충에서 그리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착취와 피착취와는 다르다. 기생충의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든 서로 어떤 관계도 없다. 착취와 피착취도 아니다. 그저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자의 배려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이중적인 계급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관계, 그리고 가지지 못한자들 상호간의 관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영악하며 악랄하다. 생존을 위해 도덕과 윤리는 아무런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다. 기생충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부문은 이집의 집사로 나오는 ‘문광’의 가족과 ‘기택’의 가족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관계는 매우 치열하다. 기택의 가족은 문광을 결핵이라는 누명을 씌여 쫓아 낸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갈등이 치열한 것은 그것이 생존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우아한 집사로 살아가던 ‘문광’은 쫓겨나면서 자신이 부리던 ‘우아함’이 자신이 아니라 가진자들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을 때나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진자와 관계가 끊어진 ‘문광’은 처절한 생존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영화를 어떻게 읽고 감상하는가는 각자의 해석과 기호에 따라 다르다.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지지 못한 두 가족의 모순이다. 결국 가장 치열한 투쟁이 일어나는 곳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세계다. 투쟁은 가진자들의 제공하는 떡고물을 차지하려는 못가진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서로 같은 처지지만 죽고 죽이는 처지로 몰려간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투쟁이 더 치열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자들의 착취를 알아챌 수 없다. 요즘의 착취는 아주 정교해져서 가진자가 못가진자를 착취한다는 식의 단순한 공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장’ 그리고 ‘문광’과 ‘기택’의 가족 사이에는 그 어떤 긴장과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모순과 갈등은 ‘문광’과 ‘기택’의 가족간에만 존재한다. 왜곡된 계급적 갈등이 왜곡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지지 못한자들간의 투쟁은 치열하지만 아무런 생산적 결과도 없다. 그렇게 운명지워진 자들의 한계이다. 관계의 파탄은 ‘박사장’의 죽음이다. ‘박사장’의 죽음은 모든 문제를 종식시켰다. ‘기택’이 ‘박사장’을 살해하는 것은 박사장의 눈앞에 벌어진 사건보다 정작 냄새를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사장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냄새를 참지 못하는 순간 죽임을 당한다. 가지지 못한자와 가진자의 관계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가진자가 가지지 못한자의 냄새를 참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은 상호 존재한다. 가진자는 가지지 못한자의 순종적인 행동양식을 ‘선’으로 생각한다면, 가지지 못한자들은 가진자의 ‘최소한의 인내’를 ‘선’으로 생각할 뿐이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끝날 뿐이다. ‘박사장’의 죽음은 가진 자가 베풀던 온정과 배려의 종식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모순과 갈등도 동시에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지지 못한자들의 갈등도 가진 자들의 세계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은연 중 보여주는 것이리라.

계급적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계급적 영화가 아니다. 계급 갈등이 아니라 계급내 갈등에 관한 영화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했다. ‘기택’과 ‘문광’ 가족의 싸움을 통해 마치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갈등과 모순을 떠올렸다.

영화를 다보고 나서 아쉬운 점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사회와 세상의 모습은 분명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그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만일 ‘문광’과 ‘기택’ 두 가족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 기묘한 생존은 더 연장될 수 있었을 뿐이다.

매우 잘 만들었다. 시나리오도 탄탄하다. 그러나 그 결말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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