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 규정하는대로 산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 라고 규정했다.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에서 벗어나 여성인권운동가로 자신을 자리매김 했기 때문에 매우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한다. 미국 의회에서 증언도 하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일제의 위안부 만행을 알린 것도 자신 스스로가 <여성인원운동가>로 규정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로 규정한 다음 이용수 할머니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두번의 입장문 혹은 언론 보도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첫번째 문안은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고한다. 두번째 입장문은 여러 사람이 초안을 잡고 할머니가 최종 승인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입장문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도 이용수 할머니가 그런 지적 능력을 가졌을리 없다는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윤미향과 정의연(혹은 정대협)이 잘못한 것은 이용수 할머니를 그저 위안부 피해자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미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과 대응 혹은 더 이상의 지적 능력의 보유자였다. 윤미향은 그런 이용수할머니와 몇몇 할머니의 각성이 달갑지 않았을 뿐이다. 이용수 할머니와 일부 할머니들은 단순한 위안부 피해자를 넘어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했던 분들이다.

주체적인 삶은 저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이 일본에 저항한 것과 이용수 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윤미향에게 저항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권위와 불의에 저항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그 순간 그 누구든지 주체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높은 직책에서 좋은 보수를 받아도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지니지 않으면 그는 노예적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에게 저항했다. 이용수 할머니의 저항은 윤미향을 국회로 끌어드린 기성권력체계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다.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친문세력 일파의 대응은 일본이 위안부에게 대한 대응과 전혀 다르지 않다. 친문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용수 할머니를 <매춘부>라고 부르고 있다. 한번 매춘부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발언을 한다.

우리가 이용수 할머니 사건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친문세력의 실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권이 파시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많은 사람들이 했다. 바로 그런 주장을 실증하는 것이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인 것이다.

인간은 악마와 천사 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어떻게 마음먹는가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이용수 할머니를 <매춘부>였으니까 이런 짓을 한다고 하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악마의 품에 안겼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런 상황을 방치 조장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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