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플로이드의 죽음과 미술

미국에서 혼란을 초래한 흑인 플로이드의 사망사건을 보면서 예술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예술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중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회화에 관한 것들이다. 예술은 여러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음악과 같은 예술은 매우 권력지향적이며 체제지향적이다. 음악가와 작곡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국뽕과 비슷하다. 모두들 자기 나라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서양에서 음악이라는 것이 원래 권력자들의 후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와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서민의 애환을 다루거나 삶의 고통을 토로하는 부분도 많다. 그렇게 본다면 서양음악보다 한국의 전통음악이 훨씬 예술의 본질에 더 가깝게 접근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이후 미술은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안니었다.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는 작업이 미술 작업이었다. 각종 수없이 많은 유파들도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도 기존의 사고방식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이 그림의 방식이라는 틀을 깨고 사회적 문제에 도전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꽤 오래전부터 페미니즘 미술을 통해 우리사회의 남성과 여성의 틀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적 문제에서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동성애 문제였다. 동성애자들이 당하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미술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전시되었던 데이비드 호크니는 동성애의 문제를 회화분야에 끌어들인 사람이 아닌가 한다. 미술이 금기를 깨는 역할을 한다면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분야가 있다. 바로 인종문제다. 이제까지 미술에서 인종문제의 금기를 깬 작가나 작품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서양사회에서 인종문제가 동성애보다 더 금기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흑인 플로이드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 금기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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