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군대를 투입한다고?

미국 워싱턴DC의 시위대 머리위로 군용헬기가 날았다. 블랙호크라고 한다.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는 시위대를 테러리스트라고 하면서 연방군을 투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모든 것을 선거와 연계해서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그런 행동이 재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하게 묶어 두는 것이다. 그가 어떤 계산을 했는지와 관계없이 이번 일은 선을 넘었다.

트럼프도 트럼프지만 미국의 합참의장 그리고 군인들에게 실망을 했다. 대통령이 워싱턴에 블랙호크를 띄우라고 해도 합참의장은 거부를 했어야 했다. 그리고 사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죽어야 영원히 사는 법이다. 미국의 합참의장은 자신이 시민을 상대로 군대를 투입한 책임자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국방장관이 트럼프에게 반대하는 것을 보니 그는 명예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헬기조종사도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헬기 조종사는 장교일 것이다. 미육군에서 헬기조종사는 가장 뛰어난 장교에 속한다. 아무리 군대라고 하더라도 시킨다고 다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군에 최소한의 시민적 양식을 갖춘 장교들이 있다면 자국 시민들 머리위를 전투용헬기로 위협비행하는 것을 두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정말로 연방군대를 투입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 미국중앙정부가 주에 개입하는 것은 우리나라 정부가 도단위 지방자치단체에 개입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미국에 총기소유가 허락된 것은 연방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시민적 권리라는 측면이 있다. 미국은 나라가 만들어진 과정이 우리와 다르다.

만일 이번에 연방군대가 투입된다면 이것은 연방과 주의 오래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주는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많다.

가만 생각해보면 주의 입장이 강화되면 트럼프로서는 대선에서 나쁘지도 않은 선택이다. 미국민들 총수로 계산하면 민주당이 공화당을 이긴다. 그러나 주별로 선거인단을 계산하면 공화당이 유리하다. 트럼프도 힐러리에게 총득표수에서는 졌지만 주별 선거인단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보면 트럼프가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꼼수는 미국이 이제까지 지켜왔던 나름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미국은 파시즘적 국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는 파시즘이다.

김종인의 생각을 읽어 보다.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경제가 선방했다고 보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오는 경제위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시경제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부는 추경을 하겠다고 나섰고 김종인은 추경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요즘 김종인이 미래통합당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관심이 간다. 김종인은 보수와는 결별을 할 모양이다. 그것이 수구이던 개혁보수이든 기존의 보수적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당의 지지계층을 2-30대로 옮기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은 4-50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김종인이 미래통합당의 지지계층을 2-30대로 지향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2-30대의 지지를 받으려면 기존의 보수라는 타이틀로는 안된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의 정치로는 2-3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김종인이 생각을 바꿔라고 요구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세대간 입장차이가 될 확률이 많을 것 같다.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뉘지 않을까 한다. 지금 현재 기득권은 당연히 4-50대이다. 이들이 현재 문재인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계층이다.

신문을 통해서 간간히 김종인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줏어 들은데 불과하지만 그의 전략은 매우 파괴적인 것 같다. 그가 추경예산을 선선히 받아 준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이번에 다가오는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은 순전히 문재인 정부가 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시당초 미래통합당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리라.

문재인 정권의 운용자들의 역사적 사명은 기존의 수구적 정치세력을 종식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의 능력은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는데서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리는 김진태와 민경욱과 같은 사람을 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문제는 비판과 비난에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국가경제운영과 같은 건설적 분야 경제위기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종인은 그런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올해 후반기가 지나면 경제위기로 인해 정권의 안정성은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김종인은 그 다음 수순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의 진영구분도 바뀌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 민주당은 보수가 되어야 하고 그에 도전하는 20-30 세력은 진보가 되어야 한다. 김종인은 진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인의 전략이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사는 일대 혁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가 보수가 되고 보수가 진보가 되는 것은 정치적 혁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김종인이 건재하고 있는 한 홍준표 등등은 다시 입당하기 어려워질 것 같다.

미국과 중국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려면 먼저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과 싸워왔다. 2000년 넘는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 중국은 계속 커지고 우리는 점점 작아졌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런 역사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중국과 같은 강자들에게 기대려는 습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조선조 당시 노론의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그저 성리학 때문일까? 압도적인 힘을 벗어나기 어려우니 거기에 적응하기 위한 논리체계를 만들고 거기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였는지도 모른다.

조선을 망하게한 그 습성이 그대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고 지금은 미국과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습성이 나라를 망하게하거나 어찌어지 하더라도 겨우 유지하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미국도 지금의 중국도 우리가 따라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나라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냉전이후 거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행동했다. 소련의 붕괴로 인해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데로 마음껏 했다. 대안으로서의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결국 미국의 자본주의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갖추어졌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민주주의도 형식과 내용이 모두 서로 갖추어져야 하는 법이다. 그런점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도 불완전하다. 형식은 갖추어졌는지 모르겠으나 내용은 부실하기 여지없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월스트리트 과두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의 미국민주주의는 영국 전성기의 민주주의보다 오히려 질적인 면에서 후퇴한 측면이 없지 않다.

미국이 이렇게 퇴행해버린 것은 소련의 붕괴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한다. 소련대신 중국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으나 소련과 중국은 차이가 많다. 지금의 중국은 사실상 사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자신들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이야기 하지만 역사적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중국은 청나라를 이은 또 다른 왕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소련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당시 세계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중국이 뭔가 애매모호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등장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류의 역사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저 힘세고 강력한 국가의 등장일 뿐이다. 힘의 역학관계만 작동하고 있을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미국과 중국은 다르다. 미국이 교활한 착취구조를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나 그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가치가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은 세계사적 의미를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사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패권경쟁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하는 역사발전의 의미를 구현해 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저 강대국으로서 중화사상의 연속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이어 받더라도 새로운 역사적 진보를 이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은 중국이 역사발전에 기여하기 보다는 자국의 힘만 강화하고 약소국을 억압하는 구조를 공식적으로 공고화 할 수 있다는 일반의 우려 때문이다. 미국은 적어도 억압구조를 만들더라도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노골적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헤게모니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기대와 현실은 다른 법이다. 기대에 머물러 현실을 무시하면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주변국의 눈치를 본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국에 의지하거나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과 삶의 방식을 우리가 스스로 창출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미국과 중국을 통해서 우리가 잘 살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굽히지 않고 미국을 믿고 중국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국과 중국 둘 다 거기서 거기다.

일본은 쌀미자를 미국의 미자로 쓴다. 우리는 아름다울 미자를 쓴다. 한국은 미국을 좋아해서 아름다울 미자를 쓰고, 일본은 미국을 얕잡아 봐서 쌀미자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었다.

미국은 우리의 이상향이었다. 요즘들어 미국을 보면서 지금의 미국이 과연 내가 생각했던 나라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첫번째는 트럼프가 막무가내식으로 전세계를 윽박지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주장하던 이상과 가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무례하게 방위비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저런 국가와 어떻게 동맹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은 힘이 아니라 존경을 받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맹주가 이상과 가치가 아니라 힘과 협박으로 동맹국을 억압한다면, 그런 동맹은 오래가기 어렵다.

두번째는 코로나19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왜 저렇게 대응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사전에 충분하게 경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거의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 미국이 당한 피해는 제대로 조치를 하지 않아서 피해가 커진 것이다. 미국의 관련 관청과 전문가들은 이미 위험성을 사전에 예고했다고 한다. 그것을 트럼프가 무시한 것이다.

세번째는 미국 경찰이 별 잘못도 없는 흑인을 죽인 사건이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미국의 흑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차원이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보았을 때 미리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면 이렇게 폭동의 수준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가 시위대에 사살 운운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 마치 1980년 광주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았다.

미국이란 사회가 언제 어떻게 찢어지고 분열될 지 알 수 없는 취약한 상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찰이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통상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중국도 공안의 힘이 세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이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도 경찰의 힘이 세다. 그것도 미국이란 체제가 겨우겨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국과 중국의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둘다 불안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군부독재 시대에 경찰의 힘이 대단했었다.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국과 중국이 둘 다 저런 모양이니 앞으로 누가 패권을 확보하던지 세상은 편치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G7 회의에 우리나라를 옵저버로 초대한다고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이지 분명하다. 중국에 대한 봉쇄라인을 구축하는데 한국이 앞장서라는 이야기다. G7이 중국을 봉쇄하자는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지는 미지수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 모두가 다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이미 미국은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정점을 지났다. 정점에 올라가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내려오는 시간은 예상보다 빠른 경우가 많다.

미국은 중국봉쇄를 통해 흔들리는 패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미국은 외부의 도전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으로 무너지고 있는 양상이다. 코로나19사태와 인종차별문제는 미국이 심각한 내부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의 번영은 전세계의 희생을 대가였다. 미국 내부에서는 흑인과 소수인종들의 희생,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남아메리카 각국의 희생을 대가로 미국의 풍요는 유지될 수 있었다. 전세계가 미국의 시장이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이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체제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그런 체제는 가치와 이상이 아니라 강압과 강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전세계 군사비의 절반을 미국이 쓴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미국이 누리는 헤게모니의 정체가 바로 군사력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미국이냐 중국이냐가 아니다. 우리의 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간혹 당신의 미국관, 당신의 중국관이 마음에 안든다는 사람을 만날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미국관과 중국관이 아니라 당신의 한국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떨어져서 독자적인 위상을 가지지 않으면 원치 않는 싸움에 말려들어가기 십상이다. 중국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지 미국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타도를 외치던자가 타도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

역사는 변한다. 세상 만물이 그러하듯이. 그런데 변화하는 과정은 일정한 양상을 띠고 있다. 타도를 외치던 자들이 다시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진행하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가 살았던 시기에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살았던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자유로워진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던 만큼의 속도는 아닌 것 같다.

역사의 진전 속도가 늦은 것은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세력을 수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신들은 기어코 보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보수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말만 그렇지 본질은 수구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더 교활하다. 역사의 진보를 끝까지 막아서기 때문이다.

한때 진보는 보수로 변화한다. 보수는 수구로 바뀐다. 수구는 보수라고 주장하고 보수가 진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과거의 정체성과 현재의 정체성 사이에 발생한 혼란 때문이다. 진보가 보수가 되고 보수가 진보가 되는 과정은 당연히 기득권세력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등따습고 배부르면 보수가 되는 법이다.

윤미향과 조국 사건으로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 민주당 세력이 당당히 보수의 반열이 올랐음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항상 다양한 타도를 외쳤던 자들이다. 미제타도, 일본타도, 기득권 타도 등등.

그러나 그들이 이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항상 타도를 가장 목소리 높여 외쳤던 자들이 가장 극적으로 타도의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비난하고 타도하고자 하던 대상과 마찬가지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부패하지 않으면 언제고 타도를 외칠수 있다. 그러나 부패하면 타도의 대상이 된다. 그런 간단한 원리를 모르는 헛똑똑이가 조국과 윤미향 그리고 현재의 친문집권세력이다.

아마 그들은 불과 얼마전 미래통합당이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심정을 이제부터 느끼게 될 것이다. 돌이킬 방법? 없다. 스스로 변하기 전까지는.

조국 타도, 윤미향 타도, 친문보수세력 타도 !!!

사드 덕분에 한국의 안보가 안전해졌는가?

안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금과옥조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평화를 원하거는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말이다. 비잔틴제국의 베제티우스가 쓴 ‘군사학 논고’에서 나오는 말이다. 비잔틴 제국은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 무하메드2세에 의해 멸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까지 스파르타에 군사학의 전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베제티우스의 군사학 논고도 스파르타의 산물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라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정치인들에게는 서로 동맹을 견고하게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도록 선린외교를 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해석되었다. 군인들은 좋은 무기의 확보와 훈련이 잘된 군대의 유지를 의미했다.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은 좋은 무기의 확보라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었다. 내가 어마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이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고 그럼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좋은 무기를 가지면 상대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더 좋은 무기를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군비경쟁은 숙명과 같이 이루어졌다.

무기와 군대가 많이 밀집한 곳은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 평화를 원하거든 장비와 군대를 줄여 나가야 하는 법이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한국과 월남 그리고 아프간에서 제한전을 벌였지만 유럽대륙에서 전면전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군비감축을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도 가급적 군대와 무기의 배치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은 무기와 군대를 쌓아놓는다고 안전해지는 상황이 아니다.

미국이 사드 장비를 개선한다고 해서 소동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개량된 요격 미사일을 배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이 군비경쟁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사드지만 내일은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가 논의될 것이다.

사드 배치와 관련하여 양진영간 첨예한 논쟁이 있었다. 사드로 인해 한국이 안전해질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고 사드로 인해 오히려 한국의 안보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모르겠다. 사드로 인해 한국의 안보가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

홍콩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나

미중간 다툼이 홍콩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당장 홍콩내부에서 반발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도 반발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정치적 격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홍콩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상황평가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홍콩에서 시위가 발생하면 모두들 인권문제를 제기한다. 국제정치세계에서 인권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인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평가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인권을 매우 뭉뚱그려서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매우 다양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냉전시기에 인권이란 자본주의 진영이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때 인권은 정치적 자유를 주로 의미하고 있었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라고 한다. 그러나 인권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보편적이 될 수도 있고 특수할 수 도 있다. 세상 어떤 가치도 보편적인 것은 별로 없다. 인간과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개념은 매우 광범위해서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평가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가만 따져보면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상황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인권을 정치적 자유가 아닌 인종과 빈부문제로 보면 전세계에서 인권이 가장 낙후된 국가는 미국일 수도 있다. 당장 미국에서 별 잘못한 것도 없는 흑인을 눌러 죽인 것이 미국 경찰 아닌가 ? 미국에서 흑인과 유색인종들이 받는 차별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 위협이다. 정치적 자유보다 인종적 차별은 더 심각하다고 할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에게 미국에서 살래 아니면 중국가서 살래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같은 노동을 하면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이다. 예컨데 인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차별이다. 정치적 자유에 앞서 각종의 차별이 가장 크게 인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심각하다.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국가인 미국이 정치적 자유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인권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라고 비난하는 것은 진의를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미국에 있어서 인권이란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제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국제정치문제에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부는 옳고 일부는 틀릴 수 밖에 없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인권외교를 주장한 것도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공격이었을 뿐이다.

홍콩의 사태를 보는 관점도 다양할 수 있다.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두개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중국민의 입장에서 홍콩은 1839년 아편전쟁으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이자 서구열강들의 침략의 상징일 뿐이다. 게다가 호시탐탐 다시 중국을 노리는 서구의 트로이 목마일 뿐이다. 중국민들이 홍콩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만일 우리가 홍콩의 시위를 지지한다면 홍콩을 자신들의 상처로 생각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어떤 답변을 해야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중국사람들의 눈에 홍콩인들의 행동은 마치 우리가 친일파를 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미 홍콩의 시위가 미국 정보기관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서 다 밝혀진바 있다. 중국도 그런 홍콩의 시위주동자들을 미국의 끄나풀이라고 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170년 넘게 영국적 제도하에서 살아온 홍콩사람들에게 중국의 강압적인 태도는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홍콩 민주화 운동의 지도부들이 미국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중국도 이처럼 과격하게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콩과 달리 마카오는 별 잡음이 없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뺏긴것과 달리 마카오는 중국이 필요해서 포르투갈에게 조차를 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조차지였으나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은 역사적인 과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이 홍콩의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런 문제를 더 이상 끌지 않고 마무리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서 이것이 옳으네 아니네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윤미향 사건과 시민단체 과두정

윤미향 사건으로 한국이 또 다시 분열되었다. 조국 때문에 분열되고 다시 윤미향 때문에 분열되고 있다. 조국의 사건과 윤미향 사건은 내용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또 비슷한 것 같다. 조국 사건은 본질적으로 권력형 부정부패다. 윤미향은 시민단체의 부정부패다. 부정부패는 그것이 진보건 보수건 권력의 핵심부건 시민단체건 할 것 없이 모두 척결되어야 한다.

두사건 모두 감시 감독의 눈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졌다. 청와대에는 박근혜 정권 이후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에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야당이 왜 이문제를 집중거론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결국 조국 같은 일탈적 사건이 발생한 것은 감시감독하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견제와 감시를 하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든 반드시 부패한다. 지금 청와대는 아무런 감시감독 없이 3년이 지났다. 그 속이 얼마나 어떻게 썩었는지 알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유다. 노무현 대통령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윤미향은 시민단체를 통한 부정부패 사건으로 보인다. 아마 시민단체에 대한 감시감독의 눈이 철저하지 않았나 보다. 만일 다른 시민단체도 정의연과 비슷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운동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모두 다 안다. 대전의 김소현이라고 하는 변호사가 지역에서 각종 이권들이 소위 운동권 세력에 의해서 나뉘어진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통합당으로 출마해서 떨어졌다.

왜 더불어 민주당의 이해찬은 윤미향을 지지 옹호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처럼 정의연으로 부터 돈을 받아 먹어서? 글쎄 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 받아 먹었을까? 그것보다는 그런 시민단체들이 모두 지금 친문세력과 더불어 민주당의 사실상 외곽조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민단체들이 권력의 기반인데 그것을 허물어 뜨리면 스스로 자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문재인이나 이해찬이 극구 윤미향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 사건에 대해 그 어떤 시민단체도 정부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어떻게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그 많은 여성단체들도 아예 나 모른체 하고 있다. 그런 침묵은 음모의 표식이다. 지금 침묵하는 자들은 음모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시민단체가 정권의 시녀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부산시장 오거돈의 성추행 사건으로 드러난바 있다. 이제 그들의 침묵은 그것을 확인해 주고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운동권과 시민단체 과두정치체제가 아닌가 한다. 운동권 출신들이 시민단체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유례없는 시민단체 과두정치체제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나마 양심있던 일부 운동권 출신들은 이런 현상을 비난하고 걱정하지만, 이미 생계가 달린 몰양심한 운동권 출신들은 그런 충정따위는 간단하게 친일부역으로 몰아버리는 몰염치까지 생기고 말았다.

악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세력을 상실한다.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양지로 소환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시민단체들도 어둠에 숨어있지 말고 밝은 양지로 나와라. 그래야 너희들도 살고 나라도 산다.

인간은 스스로 규정하는대로 산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 라고 규정했다.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에서 벗어나 여성인권운동가로 자신을 자리매김 했기 때문에 매우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한다. 미국 의회에서 증언도 하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일제의 위안부 만행을 알린 것도 자신 스스로가 <여성인원운동가>로 규정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로 규정한 다음 이용수 할머니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두번의 입장문 혹은 언론 보도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첫번째 문안은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고한다. 두번째 입장문은 여러 사람이 초안을 잡고 할머니가 최종 승인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입장문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도 이용수 할머니가 그런 지적 능력을 가졌을리 없다는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윤미향과 정의연(혹은 정대협)이 잘못한 것은 이용수 할머니를 그저 위안부 피해자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미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과 대응 혹은 더 이상의 지적 능력의 보유자였다. 윤미향은 그런 이용수할머니와 몇몇 할머니의 각성이 달갑지 않았을 뿐이다. 이용수 할머니와 일부 할머니들은 단순한 위안부 피해자를 넘어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했던 분들이다.

주체적인 삶은 저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이 일본에 저항한 것과 이용수 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윤미향에게 저항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권위와 불의에 저항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그 순간 그 누구든지 주체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높은 직책에서 좋은 보수를 받아도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지니지 않으면 그는 노예적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에게 저항했다. 이용수 할머니의 저항은 윤미향을 국회로 끌어드린 기성권력체계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다.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친문세력 일파의 대응은 일본이 위안부에게 대한 대응과 전혀 다르지 않다. 친문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용수 할머니를 <매춘부>라고 부르고 있다. 한번 매춘부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발언을 한다.

우리가 이용수 할머니 사건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친문세력의 실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권이 파시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많은 사람들이 했다. 바로 그런 주장을 실증하는 것이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인 것이다.

인간은 악마와 천사 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어떻게 마음먹는가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이용수 할머니를 <매춘부>였으니까 이런 짓을 한다고 하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악마의 품에 안겼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런 상황을 방치 조장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집권세력이 이상한 짓을 하는 이유

더불이 민주당이 하는 행동이 이상하다. 노무현 재단에 무슨 비리가 있는 것 같은 이야기를 스스로 흘리고 있다. 설훈 의원은 갑자기 KAL기 폭파 재조사를 하자고 한다. 김태년 의원은 때지난 한명숙 뇌물사건 재조사를 하자고 한다.

왜 이런 일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문제는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지적 상황변화나 경제환경으로 보아할때, 이렇게 정쟁과 같은 일로 시간을 보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다.

통상 집권여당이 과거사건 재조사 문제를 꺼낼때는 자신들이 열세에 몰려 있을때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적 변화가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고 교역환경이 나빠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정권의 정당성은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모두 다 확보해야 통치가 가능하다.

통상적으로 보면 경제가 잘돌아가고 주변국과 원만한 관계를 잘 유지하면 정권을 가장 강력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당성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경제문제와 대외안보환경의 변화에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별로 없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다가오는 경제위기나 국제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다른 이유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이상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

과거사문제나 윤미향으로 대표되는 반일 프레임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다가오는 안보 및 경제위기에 문재인 정권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위기에 빠지면 그때 과거사 문제나 반일 프레임을 이용해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사전 여건 조성작업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현정권은 위기가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패배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집권세력이 커다란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노무현 재단에 검은 구름이 뒤덮고 있다는 알쏭 달쏭한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큰 범주속에 윤미향 사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윤미향을 파기 시작하면 시민단체 대부분의 문제를 다시 건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시민단체에 국고 보조금 주는 문제가 도마위에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이 친문세력의 숙주노릇을 해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가오는 위기에 대한 패배의식이거나 친문세력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 전체의 윤리적 법적 일탈이거나 간에, 이번에 더불어민주당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과거사 재조명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준 낮은 정치 공작에 다름 아닌 듯하다.

그것말고 다른 무엇으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